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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은 왜 빨간머리 앤을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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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정 기자
기사입력 2017-03-09

낯선 타국에서 치명적인 독극물 테러로 비극적 운명을 맞은 북한 김정남의 소식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백주대낮 공공장소인 공항에서 불과 몇 초만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한 것도 그렇거니와 그 배후에 북한김정은이 있는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고모부 장성택을 비롯한 측근 제거를 포함해 이복형 김정남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정권의 눈밖에 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보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한때 아버지 김정일의 대를 이을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김정남은 소위 백두혈통의 금수저 출신이다. 덕분에 일찌기 스위스를 비롯한 서방세계 유학의 기회를 통해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되지만 세습과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돼야 할 그가 오히려 자신이 속한 체제가 가진 모순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그 개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김정일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의 낙후된 경제를 위한 자본주의 도입과 개혁 개방을 건의해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권력서열에서 퇴출된 결정적인 원인이 됐고 결국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경계인으로 살면서 타국을 떠도는 처지가 됐다.
  
김정남의 죽음은 다분히 상징성을 띤다. 그는 소년시절부터『빨간머리 앤』을 아주 좋아해 외서로도 자주 읽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래서일까. 그는 주인공 소녀의 독특한 빨간 머리만큼이나 파격적인 돌출언행을 보여왔다.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어서…'라며 여권을 위조해 가족과 함께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추방당한 전력(2001년)이 있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3대 세습을 추종하는 일은 없다”(2011년 도쿄신문 인터뷰), "북한은 곧 망한다" 등의 정권저격수같은 거침없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여기에 그가 새겨 넣은 팔과 복부의 거대한 문신은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으며 체제가 요구하는 방침과 상관없이 나름의 무척이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한다.
  
그런 김정남이 제거됐다. 비록 실권은 잃었지만 북한사회에 개방과 개혁이라는 일말의 변화를 가져다 줄 명분을 가진 상징적인 존재였던 김정남. 그가 당한 테러는 한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전체주의 속에서의 개인주의, 사회주의체제의 억압과 통제 속에서 자유주의가 북한에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해 준 셈이다.
  
빨간머리 앤은 자유와 기회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며 고아출신이란 핸디캡에 굴하지 않고 부당함에 대해서는 솔직한 자기표현을 할 줄 알며, 주어진 기회는 부단한 노력으로 붙잡아 한 단계 한 단계씩 밟아 꿈을 이루어 간다. 앤에게서 구속, 두려움, 공포, 억압, 닫힌 사고와 같은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앤을 좋아하고 그녀가 속한 자유스런 세계를 동경했던 김정남. 세계에서 가장 고립되고 경직된 체제 하에서 성장했지만 결코 그 세계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에게 앤이 누렸던 자유와 풍부한 상상력과 솔직한 발언들은 결국 용납될 수 없는 한낱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그가 추구한 '앤스러움'은 그에게는 북한 체제의 갑갑함에서 해방시켜줄 탈출구였을지 모르나 그것은 그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어 죽음의 대가를 치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록 고위층의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획일화된 세계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인권 억압이 당연시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이 보장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 김정남이 가졌던 특권은 진정한 특권이 아니었고 기회도 진정한 기회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빨간머리 앤은 김정남에게는 구속되지 않는 자유이며 노력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세계에 속한 인물로 그 자신의 이상이 오롯이 구현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김정남의 죽음은 북한으로서는 빨간머리 앤이 상징하는 자유세계로의 변화 가능성이 사라진 것과 같다. 
  
암살 용의자들의 재판이 진행중인 가운데 북한은 유감이나 사과의 표명은 커녕 혐의 사실을 일체 부인하고 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빨간머리앤 식의 평화로운 소통방식을 거부한 채 지난 6일 보란듯이 훈련용 탄도미사일을 4발이나 펑펑 쏘아 올렸다.
 
개혁 개방과 변화의 기회를 아예 차단시키고 고립무원의 행보를 이어가는 북한 정권을 지켜보고 있자니 자유와 이상, 행복 추구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인 북한 주민들의 처지가 김정남의 비참한 죽음과 겹쳐지며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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