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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미술, 무엇을 남겼나

김민의 '예술 읽어주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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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예술평론가)
기사입력 2017-04-24

나의 기억에서 어렸을 적 가장 재미있었던 놀이는 미술이다. 단순한 그리기가 아니라 행위 또한 미술이라는 규정 안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미술이라는 것은 굉장히 다양하다.

 

필자가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방문미술 지도에서 제일 어린 나이의 학생이 3살이었으니(누가 선생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미술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시했던 미술이 한국에 등장한 것은 1880년쯤이니 미술의 등장은 기껏해야 100년이 넘었다. 우리나라의 1세대 서양화가인 김찬영의 말을 인용한다면 1910년대만 하더라도 미술은 일반인들에게 낯선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직업이 미술이란 말을 들은 순사군은 크게 자에 의심을 품고 순사 군이 가로되 미술은 요술의 유인줄 알거니와 그러한 것을 배우려고 유학을 하였나라고 하니 나는 몸에 소름이 끼쳤다.

    

우리나라에서 미술이라는 말이 문헌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무렵부터인데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쑥 나타난다.

 

우리나라 미술은 서양문명을 가장 적극적으로 흡수한 일본으로부터 시작됐으며 일본과 우리가 다른 점은 근대 일본의 미술은 국가 주도하에 서양 문명을 이식하는 과정에서 개념을 창안하고 정립한 반면에 우리나라는 미술이라는 낯선 개념을 맥락 없이 한꺼번에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기술의 의미가 강했던 미술의 의미가 현재와 같은 순수 미술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0년대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미술과 같은 행위는 무엇이라고 불린 것일까? ‘미술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전에 서화와 상, 도자기 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개념은 부재했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사대부의 교양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미를 공통으로 하는 유사성의 집합은 아니었다. 이처럼 상이한 제작 목적과 기능, 가치를 가지고 있던 전통적 사물의 배치가 미술이라는 개념과 함께 새로운 배치로 전환된 것이다.

 

▲ 1922년 조선미술 전람회. 근대적 미술개념이 생겨나면서 박람회와 미술관 미술전람회가 같이 들어오게 된다.       © 뉴스다임

 

이러한 근대적 미술개념의 시작으로 박람회와 미술관 미술전람회가 같이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대적 상황으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모든 것은 일제강점시기에 들어온 것이다. 식민국이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 문화통치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당시 화가들은 몇 안 되는 부잣집 아들이나 딸이 주류를 이뤘으며 지금과는 다르게 화가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서 수상을 하고 전시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미술가들은 조선미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도쿄미술대학 교수들이었고 당시 일본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에 6개월 머문 사람들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높은 수준의 입상은 일본인 화가들에게 돌아갔고 작가들은 한국의 경향을 연구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보다는 일본 미술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시기에 일본이 우리에게 만들어 놓은 정체성의 손상 중 하나다. 물론,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이미 지나온 역사이며 그로 인해 한국근대미술이 성립돼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잃어버린 우리의 정체성과 한국미술의 향토성 논란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 가치를 다시 재정립해야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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