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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조각가, 김복진

김민의 '예술 읽어주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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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예술평론가)
기사입력 2017-07-11

모든 것의 처음, 시작이라는 것은 큰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김복진(1901~1940.8.18)이 살았었던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은 그에게서 최초의 조각가라는 이름을 남겨놨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복진의 역사적 위상은 낮은 편입니다. 그는 조소작가로 현존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는 점, 한때 좌파로 활동해 분단 시대 이후 금기 인물이었다는 점, 제자의 다수가 월북했다는 점, 직계 유족의 불행한 말로로 가문이 단절된 것과 같은 이유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서거 55주기(1995)를 기념해 조직된 김복진기념사업회의활동 등으로 그의 존재와 의미가 서서히 부상하고 있습니다.

 

▲ 도쿄미술학교 시절의 김복진, 1925년 2월경.     ©뉴스다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일제하 사회주의 사상운동과 조직 활동의 최전선에서 활동을 한 당대 유일한 예술가였습니다. 그 누구도 김복진처럼 직접 당 활동을 하면서 사상운동의 최전선에 선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는 3.1운동에 참가한 1919년부터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당한 적이 있으며 토월회, 파스큐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거쳐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식민지 민족해방 문예운동가로, 정치투사로서 다채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필자가 김복진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미술계 인사 중에서 항일독립운동가로 공인받은 것은 그가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미술교육이라는 것은 본국의 땅에선 전무한 상태였으며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집안의 자녀는 일본에서 유학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귀국한 이후로는 일본 심사위원들이 있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상을 받는 것이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길이었으니 그들의 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더 특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복진은 예술이란 “인생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세, 더욱 인생을 미화하고자 하는 정력, 이와 같은 박력을 가진 예술을 혼구”라고 설명하면서 ‘예술이 인생의 모든 실상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며 따라서 ‘생활과 직접 관련을 갖는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그에게 생활이라는 것은 즉, 일본을 배제하고 조선을 독립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당시의 예술이라는 것은 지금 현대미술과는 달라서 작품에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보다는 미의 표현에 집중돼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불상을 제외하고는- 그는 당시에 예술 비평가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상으로 살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를 동반한 서구문명이 힘을 잃은 조선 땅에 들이 닥쳤을 때부터 시작된 미술은 조선민중을 회유시키고 마취시키자는 전통적인 정책으로 이용됐기 때문입니다. 김복진이 보기에 이는 자연스럽지 않았고 그는 "더 이상 지배세력의 마취제 역할은 할 수 없고, 더 이상 다수의 대중을 외면한 채 예술지상주의의 허망한 환영을 쫓는 상아탑은 될 수 없다"며 전의를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의 정신적·예술적 역할은 단지 10년이 아닌 그 이상일 것입니다. 비극적시대의 운명을 저항적 힘으로 받아들인 예술가 김복진은 그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선구자의 역할을 했을 것이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아 있는 작품이 한 점도 없는 불우한 천재 조각가’가 아닌 이 시대에서 다시 연구돼야 하는 예술가임에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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