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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으로 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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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서 대중문화평론가
기사입력 2021-01-13

사실 바둑만큼 한국과 일본 및 중국의 위상이 급변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 한국은 전자, 철강, 조선, 반도체 부문에서는 일본을 앞서고 있으며 자동차, 기계 부문도 일본과의 격차는 거의 없다. 이러한 하드 파워 분야뿐만 아니라 K-POP으로 대변하는 소프트 파워도 일본을 압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바둑으로 바라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 살펴본다.<편집자주>

 

 

 

이창호, 세계 기전 평정하다

 

돌부처, 신산, 바둑의 신, 세계 최강 등 다양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창호가 국내 기전에서는 스승 조훈현을 밀어내고 압도적인 강자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국제 기전을 본격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이후다.

 

물론 1996년까지도 후지쯔배를 비롯해서 6회의 국제 기전 우승경험을 가지기는 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의 최정상급 기사들 중 3회 이상 세계 기전 타이틀을 차지한 경우 자체가 드물다. 그만큼 조훈현, 유창혁, 서봉수가 대단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6살에 세계 바둑계를 제패한 이창호    사진: 유튜브 캡쳐 © 뉴스다임

 

이창호의 세계 기전 획득이 국내 기전보다 늦은 이유는 음식 문제가 가장 컸다. 이창호는 중국에서 대회를 치를 때,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탈이 났다. 그런데 중국어에 능통한 이창호의 친동생 이영호가 중국대회에서 매니저로 패스트푸드점이나 일식집을 수배해 음식을 조달하게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이창호가 국제 기전에서 본인의 역량을 100% 발휘하지 못하였을 때도 사천왕 중 3인인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의 힘만으로도 한국 바둑은 세계 최강이었다.

 

그런데 이창호가 본격적으로 국제 기전에 뛰어들자 한국 바둑은 중국, 일본, 대만을 글자 그대로 압살해버렸다. 이창호의 세계 기전 획득 수는 21회로 역대 최다 횟수이고 국가 대항전인 진로배나 농심신라면배까지 포함하면 그 횟수는 30회를 훌쩍 넘긴다.

 

여기서는 중요한 장면만 되짚어 보도록 하겠다. 1996년까지만 하더라도 국제 기전 결승전에서 한국 기사들의 상대가 중국, 일본, 대만 기사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97년 이후 이창호까지 본격적으로 국제 기전에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게 되자, 결승전이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이들 3명의 한국 기사들의 잔치가 되어 버렸다.

 

즉 이창호가 참전하자 본인이 결승전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준결승이나 준준결승전에서 타국 기사들을 모조리 처내니까 한국 기사들의 타이틀 획득이 그만큼 수월해진 것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상성 관계도 한몫을 했다. 철의 수문장 네웨이핑에 이어 1990년대 중국 바둑의 최강자 마샤오춘(마효춘)은 한국 기사들에게 특히 강했는데 이창호한테는 완전히 고양이 앞의 쥐였다.

 

이창호가 국제 기전에서 제대로 활약하기 전에는 2번의 국제 기전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1997년 이후 이창호와 결승전에서 만나기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컵을 손에 넣지 못하였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이 말이 한때 유명했었다.

“하늘은 어째서 마샤오춘을 낳고 또 이창호를 낳았는가.”

 

마샤오춘을 비롯해 중국의 정상급 기사들이 하도 이창호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자 중국에서는 이러한 내용의 기사도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창호한테 지는 것은 한국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보다 위대함을 알려줄 뿐.”

 

또한 이창호가 유일하게 상대전적에서 백중세였던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는 이창호를 만나기 전에 조훈현이나 유창혁의 벽에 막히는 경우도 자주 벌어졌다.

 

현대 바둑의 종주국 '일본의 몰락'

 

1997년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가 10회 후지쯔배에서 우승했다. 이후 일본 국적자로서 국제 기전에서 우승한 일본 기사는 단 한 명도 없다.

 

2020년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중·일 국가 대항전에서도 일본이 우승한 연도는 2005년에 열린 7회 농심신라면배뿐이다. 현대 바둑의 종주국 일본은 대만과 같이 세계 바둑계에서 철저하게 들러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1998년 조치훈은 1996년부터 대삼관 3연패라는 일본 바둑계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1983년 최초로 대삼관을 차지했던 때만큼 일본 및 세계에서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이미 일본의 1위가 세계 1위였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조치훈도 일본의 1위가 세계 1위가 아니라서 죄송하다는 우승 소감인지 사과문인지 아리송한 인터뷰를 했다.

 

유창혁도 세계 기전 그랜드 슬램

 

1993년 6회 후지쯔배 우승을 시작으로 1996년 3회 응씨배 우승에 빛나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 일지매 유창혁이 2000년이 되자마자 삼성화재배, LG배, 춘란배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바둑황제 조훈현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 대회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기록은 조훈현의 그랜드 슬램 달성 시, 상대가 유창혁이었고 유창혁의 그랜드 슬램 달성 시, 상대가 조훈현이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2000년대 초까지 국제 기전은 한국 기사들만의 잔치였다.

 

오죽했으면 국내 기전에서 이창호의 독주가 워낙 거세니 국제 기전 우승이 국내 기전 우승보다 더 쉽다는 유머까지 유행을 했을까!

 

2000년대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유창혁에게 큰 불운이 닥쳤다. 2004년 아내가 새벽에 급사했고 그는 격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미 30대 중반으로 기량이 쇠퇴할 시기에 크나큰 내상까지 입자, 정상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둑계에서는 이창호가 없었더라면 조훈현의 뒤를 이을 기사는 유창혁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조훈현과 더불어 국내 기전에서는 이창호의 독주를 저지하며 국제 기전에서는 4천왕의 한 축으로서 대한민국의 바둑을 세계 최강에 올려놓은 일지매,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은 점차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값진 유산 하나가 2010년대 후반을 밝히고 있다. 여류 바둑계의 절대 지존, 세계 여류 바둑의 정점에 있는 최정이 유창혁의 직계 제자이다. 기풍도 유창혁을 이어받아 공격적이라서 인기도 매우 높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마지막 전성기

 

절대다수의 프로기사들은 나이가 들어 기량이 쇠퇴하면서 전성기에서 내려오면 다시 예전의 능력을 회복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는 세계 랭킹 최정상의 기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올드 바둑팬들에게 조훈현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장미 담배인데 소문난 애연가인 조훈현은 장미를 하루 4~5갑씩 피웠다.

 

그런 그가 이창호와 유창혁에 밀려 국내 기전에서 무관으로 전락하자 담배까지 끊어가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2000년에는 국제 기전 2관왕, 2001년에는 그 해 개최된 4개의 세계 기전 가운데 3개를 석권하고 나머지 하나는 준우승을 하는 등, 2001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2002년에는 50세의 나이로 국제 기전인 삼성화재배 2연패, 국내 기전인 KT배를 차지했다. 이는 전 세계 어떤 기사들도 이룩하지 못한 기록이다. 물론 이창호도 포함해서다.

 

2000년대 초반까지 부동의 세계 최강 이창호가 세계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었다면 2위와 3위는 늘 조훈현하고 유창혁이었다. 이 둘이 있었기에 이창호는 심리적인 압박감 없이 국제 기전에서 본인의 능력 100%를 발휘할 수 있었으리라.

 

2010년대로 넘어가면 서른 살만 넘어가도 후배 기사들에게 밀리는 상황에 나이 50에 세계 기전을 석권한 전신, 바둑황제 조훈현은 이창호, 이세돌에게 자신의 역할을 물려주고 황제의 권좌에서 내려왔다.

 

일본 바둑의 살아있는 전설 조치훈

 

2003년 일본 바둑의 전설 조치훈이 국제 기전인 삼성화재배에서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1991년 후지쯔배 우승 이후, 무려 12년 만에 세계 기전 우승이었다. 

 

앞서도 기술했는데 최상위권 기사들도 국제 기전 3회 이상의 우승은 드문 경우라고 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 대삼관 최초 달성, 일본 7대 기전 그랜드 슬램 최초 달성, 전무후무한 대삼관 3년 연속 수성으로 일본 바둑계의 모든 역사를 쓴 일본 바둑계의 신화인 조치훈에게 세계 기전 2회 우승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이기는 하다.

 

아직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던 1980년대 초 일본 최초의 대삼관 달성으로 한국인의 자긍심을 한껏 높이고 국내에 유래 없는 바둑붐을 일으킨 조치훈도 47살의 나이로 생애 두 번째의 세계 기전 우승을 차지한 채 그의 날개를 접었다.

 

여담으로 1983년 대삼관을 달성하고 한국에 일시 귀국한 조치훈은 당시 군사 정권 실세가 마련한 사석에서 조훈현과의 대국을 종용받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조훈현을 뒤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조치훈에게 군사 정권은 몇 년 동안 한국 방송에 출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 양 국가 국민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조치훈에게 바둑의 기와 예를 알 리 없는 무식한 쿠데타 정권의 치졸한 선물이었다.

 

조치훈은 숱한 귀화요청에도 아직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바둑기사가 아니면 개그맨을 했을 것이라는 그의 소망처럼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면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그의 바둑 해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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